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백업 쿼터백의 삶

NFL

by IN-N-OUT 2021. 2. 24. 23:31

본문

반응형

스타덤에서 한 발짝 떨어져 사는 느낌은 어떨까? 스타 플레이어의 백업 역할을 하는 대학 강호 팀의 쿼터백은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간단하게 설명하기는 힘들 것이다.

 

"아주 좋죠!" 맷 캐슬이 웃으며 말한다. "거짓말은 안 할게요. 저는 만족하면서 지냈어요."

 

여기서 그에 대해 알아보자: 캐슬은 LA에 거주했던 크고 잘생긴 쿼터백이었으며 최근 반세기 동안 가장 뛰어났던 풋볼 팀 중 하나에서 뛰는 동시에 최상위권 대학을 다녔었다. 그는 다른 방식으로 살았다면 참석하지 못했을 파티들에 다니곤 했다. 그는 선발이 마시지 못하거나, 혹은 마셔서는 안되는, 술 몇 잔을 추가로 마실 수 있었다. 그는 풋볼 명문 팀이라는 타이틀이 가져오는 이익들을 누렸지만, 그에 따르는 압박감은 받지 않았다. 이걸 다 고려하면, 스트레스가 없는 삶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등학교의 졸업 예정자로써, 입학 신청서에 서명하는 한 청소년을 떠올려보자. 그의 미래가 탄탄대로에 들어섰다고 생각했던 한 소년을 떠올려보자. 그의 어릴적 꿈은 너무나 가까이 있었다. 딱 한 발자국 정도의 거리에.        

 

캐슬은 1학년에는 선발 쿼터백 카슨 팔머의 뒤에서 한 해를 배우며 유급한 뒤 2학년, 늦어도 3학년에는 선발 자리를 얻어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스테판 콜리어는 조지아의 작은 도시를 떠나 오하이오 스테잇으로 향했고 브락스턴 밀러가 졸업한다면 2학년 쯤에는 플레잉 타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마이크 스턴츠는 에릭 크라우치의 시대가 끝나면 그 뒤를 이어 그가 네브래스카의 슈퍼스타로 등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런, 맥스 브라운은 첫 날부터 선발에 나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그의 전임자인 맷 바클리의 행보를 따라갈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바로 고등학교를 빨리 졸업해 스타 쿼터백을 대체한 뒤 NFL 드래프트에 참가하기 전 3년을 선발로 보내는 것이었다.

 

"상황이 완벽하게 돌아갈 수도 있었겠죠," 브라운은 말한다.

 

"저는 제가 뭔 상황에 처했는지 모르겠더군요," 콜리어의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할 겁니다."

 

대학 백업 쿼터백의 삶은 복잡한데, 확실한 장단점이 있고, 고통과 적응이 필요하다. 좋은 추억들이 많이 있긴 하지만, 현재 상황이 나아지길 바라는 감정이 지속되는 삶이다. 꿈을 쫓는 동시에 그 과정을 즐겨야 하고, 이런 두 상황에서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야 하는 스토리가 계속된다.

 

이 이야기는 방영된지 꽤 긴 시간이 지난 대학 풋볼 코미디의 명대사로부터 시작된다. "Blue Mountain State"에서 알렉스 모란이라는 냉소적이고, 방탕하게 그려지는 등장인물은 백업 쿼터백에 대한 그의 생각을 말한다. "백업 QB는 스포츠에서 가장 좋은 직장이라구. 난 맨날 술을 마셔. 난 수업에 나갈 필요도 없어. 쿼터백이지만 그에 따른 고통이 없는거랑 마찬가지지."

 

이러한 마인드셋은 드라마의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캐리커쳐지만, 실제 백업 쿼터백들에게 물어봤을 때, 모두 다 비슷한 말을 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에요." 음, 스턴츠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누가 말했든 간에 대학 시절의 저보다는 멋진 삶을 산 거 같네요." 하지만 모두가 공통적으로 말하던 점은, 만약 상황이 잘 돌아간다면 좋은 직장임에는 틀림 없다는 것이다. 개인에 따라 다른 것이다.

 

이들 중 아무도 그들이 상상했던 대학 커리어를 쌓은 선수는 없다. 그러면, 그 시절은 그들에게 무슨 의미로 남을까?

 

"동료, 친구, 여자들에게 관심이나 명성을 얻고 이점들을 누리는 것은 좋지만, 그런 상황이 자기 자신을 갉아먹는다고 해야 될까요." 콜리어가 말한다. "예를 들어, '젠장, 난 뛰고 싶어' 같은 심리인건데 만약 선발로 뛴다면 명성이나 다른 것들이 늘어나는 것을 옆에서 계속 보기 때문이죠. 양날의 검이라고 할 수 있어요."

The redshirt year

캐슬은 아마 가장 유명한 대학 백업 쿼터백일텐데, USC에서 단 한 게임도 선발 출장을 하지 못했지만 어떻게 14년의 NFL 커리어를 이어 나갔기 때문이다. 그는 USC 캠퍼스에서 35마일 떨어진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전미 최고의 쿼터백으로 평가받으며 트로잔스에 커밋한다.

 

캐슬이 커밋했을 때, 팔머는 슈퍼스타 2학년 쿼터백이였고 그가 2000년 혹은 2001년까지 뛰고 프로로 갈 거라는 예상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일이 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캐슬은 그가 레드셔츠 시즌이 필요함을 항상 알고 있었다. 그는 여느 19살의 대학 새내기가 생각하듯이, 그가 덜 다듬어졌다는 것을 확실히 인정하고 있었다. 2001년, 그의 첫번째 대학 경기에서 그가 페이드 라우트를 타는 리시버보다 15야드 이상이나 오버스로우를 했었을 때, 그는 웃음이 나왔다. 그를 번쩍 깨워줬기 때문이다.

 

레드셔츠 시즌은 대학 선수들에게는 매력적이다.

 

"아, 정말 좋았죠," 캐슬이 말한다. "친구들과 계속 놀 수 있고, 운동하고 수업도 들을 수 있고 USC 선발 쿼터백이 느끼는 압박감 같은 것도 없었어요."

 

그 기간에도, 계속해서 노력하고, 팀에 보탬이 되고, 코치들에게 인정을 받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제외하면, 스트레스가 없는 삶이죠," 그가 말했다. 콜리어는 그 시즌을 관찰하면서 배웠던 시기라고 말한다. 연습 기회를 얻지도 못하고, 코치들에게 관심을 끌지도 못한다. 그들이 리크루트 과정에서는 당신을 발전시켜줄 것이라고 말하지만 - 실제로 그렇게 하긴 하지만 - 만약 정말로 실력을 향상시키고자 한다면 혼자서 많은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이 레드셔츠 시즌이다. 

 

"많은 선수들한테는," 브라운이 말했다. "정말로 솔직하게 말해서, 노는 시즌이에요. 쉬어가는 시즌인거죠. 약간 '쟤네들이 날 필요로 하지 않으니, 난 다음시즌이나 걱정해야되겠다' 이런 마인드에요."

 

하지만 브라운은 캐슬과는 다른 기대감을 가지고 입학했다. 바클리는 USC에서 졸업했고, 브라운은 마치 처음부터 성공을 위해 연구실에서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 같은, 잘 알려진 파이브-스타 신입생이었다. 그의 미래는 밝아보였다. 그는 열심히 노력했다. 2013년 코디 케슬러에게 주전을 뺏긴 것은 충격적이었고 그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브라운은 풋볼에 몰두했기 때문에 레드셔츠 시즌을 그렇게 즐기지는 못했다. 그는 팀 내 3번째 쿼터백이였지만, 자신이 "선발에서 단 두 발자국만 떨어져 있는" 상황이라고 여겼다. 그는 수많은 필름을 연구했다. 그는 백업 리시버들과 더 많은 연습을 하기 위해 훈련 시간 이후에도 계속 훈련장에 머물렀다.

 

"어떻게 보면, 그 시기에는 약간 느슨하게 할 필요가 있었죠." 그가 말했다.

The humbling

 

"짜증났어요." 브라운은 2013년 감독 레인 키핀이 자신 대신에 케슬러를 택한 것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인정했지만, 그는 자신의 커리어가 바클리 같이 풀리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항상 알고 있었다. 그가 생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는 그가 "마크 산체즈 라우트"라고 불렀던 것인데, 잠재력을 터트리기 전 몇 년 동안 백업 역할을 해야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불쾌했었지만, 그때는 저를 이런 식으로 위로하곤 했어요. "아직 갈 길이 멀어." "아직 1년밖에 안 지났어."

 

 

브라운은 전학을 가는 것도 거부했다. 지금은 전학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을 명심하자: 2013년에는, 많은 사람들이 전학을 실패로 취급했다. 이는 주전을 따내지 못하고 포기했다는 것이고, 그 때의 브라운은 이러한 평가를 받기 싫어했다.

 

그리고 나서 키핀은 해고되었고 스티브 사키시안이 2014년 감독직을 맡았다. 새로운 쿼터백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2013년을 성장의 해라며 자신을 달랬고, 그는 레드셔츠 프레시맨으로써 스타가 될 준비를 마쳤었다. 대신, 그는 여전히 자신이 계획한대로 뛰고 있지 못했다. 여전히 그는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여전히 그는 필드 위에서, 선수들이 경험을 쌓으면서 떠올리지 않는 것들에 생각하고 있었다. 케슬러가 다시 선발이 되었고, 갑자기 고향 사람들은 "넌 뛰어야 돼. 왜 안 뛰고 있는거야?" 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때가 압박과 불편함이 자리 잡을때죠," 그가 말했다. "시험무대에 오른 겁니다."

 

스턴츠는 2001년 네브래스카의 로즈 볼 진출 이후 크라우치의 뒤를 이을 것으로 여겨졌으나, 그는 자말 로드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콜리어는 오하이오 스테잇에서 경쟁에 참여해보지도 못했으며, 2016년 커리어를 끝내버린 무릎 부상을 당하기 전 2년을 JT 배럿과 카델 존스의 뒤에서 벤치만 지켜야 했다. 브라운은 결국 USC의 선발 자리를 따냈으나 2016년 3경기를 치룬 이후 샘 다놀드에 밀려버렸다. 팔머가 2000년의 쇄골 골절, 2001년의 부진한 퍼포먼스에 시달리면서 캐슬은 팔머의 백업으로 3년을 기다려야 했으며, 이는 2003년 그의 레드셔츠 3학년 시즌까지 경쟁의 기회가 오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와 레드셔츠 2학년 맷 레이너트가 선발을 두고 경쟁했다.

 

그들은 둘 다 훌륭한 봄 학기를 보냈다. 캐슬은 좋은 스로우를 가져갔고, 자신감이 있었다. 그 당시 USC 감독이던 피트 캐롤은 봄에 선발을 결정하지 못했는데, 이는 둘 사이의 격차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고 가을 내내 연습을 번갈아가며 진행했다. 그리고 어번과의 개막전을 치루기 1주일 전, 캐롤은 캐슬을 그의 사무실로 불렀다.

 

"아, 훌륭하구만," 그는 생각했다. "감독님이 나한테 주전을 줄 모양이군"

 

"거기서 들은 건, 감독님이 저한테 레이너트를 선발로 내보낸다고 결정했다는 것이고, 만약 그가 부진한다면 제가 주전이 된다는 것이었죠."

 

"그 상황에서, 저는 확실히 실망했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3년 동안, 저는 선발 자리를 위해 죽어라 노력했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직전에 레이너트를 선발로 쓰겠다는 말을 들은거죠. 그러면서도, '하지만'이나 '혹시'같은 말들로 여지는 남겨두더군요."

 

뒷일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레이너트는 3년 동안 선발로 출장하며 단 2패만을 기록했고, 2번의 내셔널 타이틀과 하이즈먼 트로피를 수상했다. 캐슬은 대체 선발의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만약 당신이 2013년 브라운이 전학을 실패로 취급하던 시대에 살았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캐슬이 레드셔츠 4학년 시기에 전학하거나, 한 해를 유급하거나, FCS 팀으로 이적한다는 선택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뛰고 싶었고, 포지션을 옮겨 타이트 엔드나 스페셜 팀에서 뛰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해 봄 야구를 하기도 했었다.

 

"또 다른 봄학기를 보낼 수 없었어요. 풋볼과 그 때의 상황에 대해 열정을 잃었다고 해야 되겠죠. 그 감정들과 실망감이란," 그가 말했다.

 

더해서, 그는 봄학기 훈련에서 나왔는데, 백업 쿼터백을 위한 훈련은 화려하다는 말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힘든 일이죠," 콜리어가 말한다. "거의 인형 취급을 받는 거에요.'

 

봄 훈련에서, 백업 쿼터백은 선발과 같은 훈련량을 소화하나, 가을이 다가올 수록 25퍼센트 정도로 줄어든다. 3번째 쿼터백을 위한 훈련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은, 백업 스쿼드의 공격진으로 수비진과 상대하게 된다. 만약 자신이 낮은 서열에 위치한다면, 훈련 때 수비수들을 위해 공을 던져야 할 수도 있다. 아마 연습 당 한두번의 기회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이 항상 저를 열받게 하는 거에요," 콜리어가 말했다. "선발이 경기당 100번의 기회를 받고 한두번 실수한다면 그냥 넘어가지만, 우리는 훈련 당 두번 정도의 기회 밖에 받지 못하고 그 두 번이 너무나 중요해지니까요."

The lifestyle

 

USC, 오하이오 스테잇, 네브래스카, 미시간 같은 대학에서 풋볼은 캠퍼스에 깊이 스며들어 있으며 선수들은 셀러브리티로 취급된다. 스타들은 왕족처럼 대우받으며, 대부분의 캠퍼스 학생들은 누가 백업 쿼터백인지 안다.

 

캐슬은 그가 19살이나 20살 때 리쿠르트 대상 선수들을 데리고 외출했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는 걔네들을 선셋 대로(역주: LA의 유명한 도로)로 데리고 나가 거기서 나이별로 다른 클럽에 가서 우리 학교로 리쿠르트 된 선수들과 신나게 놀곤 했죠," 그가 말한다. 그들이 줄 앞에서 새치기하여 문을 열고 들어가면, 테이블이 미리 세팅되어 있었다.

 

 

맞다, 소녀들도 대학 쿼터백과 데이트하고 싶어 했다. (브라운은 웃음을 보였고, 그의 백업 시절에 만난 그의 여자친구, 빅토리아를 가진 것이 행운일수도 있다고 인정했다.) 아니면 그들은 페이퍼 제출에 1주일 혹은 2주일 정도의 추가 시간을 받았는데 풋볼 선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신같이 취급받진 않았지만, 압박감 없이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캐슬이 설명하듯이,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외출도 하고, 선발로 출장해야 되는 선수보다 칵테일 몇 잔 더 마실 수도 있죠. 그리고 선발이 경기를 말아먹으면 모두가 이렇게 말하죠, "백업한테 기회를 줘라. 캐슬을 선발로 내보내라."

 

콜리어가 말한다, "정말 어색했어요. 우리는 일종의 악명 같은걸 얻었죠. 사람들이 자신을 다 알고 있는데, 좋은 일이긴 하지만, 최소 저 같은 사람한테는 어색하게 느껴졌어요. 왜냐하면 제가 그런 관심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못 느꼈거든요. 저는 아무 것도 아직 보여주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어떤 것도 성취하지 못했지만 이름이 알려진 걸 보는 기분은 이상했어요."

 

알렉스 모란의 주장으로 돌아가자 - 백업 쿼터백은 스포츠에서 최고의 직장이다. 많은 쿼터백들이 이 대사에 웃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과거에 그 드라마를 시청했었고 거기서 몇 가지 진실들을 발견할 수 있었기 대문이다.

 

캐슬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 아주 만족하는 사람들을 만났었다. 그들은 행복해했다. 그들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을 주인공이라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안전지대를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왜 굳이 그러겠는가?

 

하지만 디 애슬레틱이 인터뷰한 모든 쿼터백들이 말하기를 오하이오 스테잇, LSU, USC 같은 탑티어 프로그램에 들어간 대부분의 쿼터백들은 그러한 안일함에 빠져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런 감정이 생기는 것을 참지 못한다.

 

하지만,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 가끔씩, 외부인들은 쿼터백 미팅이 주전자리를 놓고 다투는 경쟁적인 분위기에서 적대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반 마이어 시기의 오하이오 스테잇을 보자. 콜리어가 있을 때에는, 밀러와 배럿, 존스, 콜리어가 한 팀에서 뛰었다. 그리고 밀러가 떠나자 조 버로우가 들어왔다. 그 다음에 드웨인 해스킨스가 들어왔다. 모두가 선발로 나올 수 있었지만 콜리어는 "화기애애"라는 단어로 분위기를 설명한다. 배럿과 존스는 좋은 친구 사이였다. 버로우와 해스킨스도 마찬가지였다.

 

LSU에서, 조던 제퍼슨과 제럿 리는 2008-11 레스 마일스 아래에서 주전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하지만, 리와 제퍼슨은 친구 사이였다. 브라운은 그가 케슬러와 잘 지냈고 리더로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다널드와도 "좋은" 친구였지만, 만약 다른 포지션에서 뛰었다면 "절친"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매일마다 같은 선수들과 마주친다는 게 핵심이고, 제가 이상하게 굴거나 걔네들과 친하지 않다면 삶이 힘들어지겠죠." 브라운이 말한다.

 

그럼에도, 최소한의 거리는 있다. 브라운은 최근 전 클렘슨 쿼터백 체이스 브라이스의 인스타그램 페이지를 발견했고 거기에 그와 선발 쿼터백 트레버 로렌스와의 우정이 담긴 사진들이 많이 있는 것을 찾아냈다. 

 

"그 친구를 존중하죠. 근데 저 같으면 선발 선수랑 그렇게 친하게 지내지는 못할 거 같네요." 브라운이 농담한다. "전 그렇진 않아요."

The acceptance

브라운은 말하기를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가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던 시점은 언제일까? 그런 적은 없었다. 실제로 현실이 되기 전에는. 프레시맨 시즌에 그는 젊기 때문에 한 해만 기다리면 된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그가 다음 해에도, 캐슬러에게 주전 경쟁에서 패배했을 때, 그는 화가 났지만 다음 시즌을 위해 노력할 수 있었다. 캐슬러에게 3년째 밀렸을 때, 그는 긴 터널의 끝에서 불빛을 볼 수 있었다. 2016년, 그는 드디어 주전을 차지하지만 3주 뒤에 다널드에게 밀려난다. 한 해마다, 브라운은 그의 마음가짐을 다르게 먹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잘 될거라고 믿었다.

 

2017년에는 많은 것이 바뀌었는데, 바로 그 때, 그는 전학을 받아들인다. 그는 피츠버그에서 졸업 학년을 마쳤고 팀메이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경기 전에 팀 캡틴으로도 뽑혔었다. 그게 그의 기회였다. 3주 뒤, 그는 벤치에 앉게 된다.

 

"그 때 저는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했죠, '정말로 힘든 싸움이 되겠군,"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 때 브라운은 또 다른 기회를 얻었다. 그는 라이스 대학을 상대로 410 패싱야드를 기록했고 ACC 이 주의 선수에 뽑혔다. 그는 이것이 그의 반환점이고, 밝은 미래의 시작점이라고 믿었었다.

 

시라큐스와의 다음 경기에서, 그는 어깨를 다쳤다. 그 이후 그는 단 하나의 스냅도 받지 못하였다.

 

최근 나온 팟캐스트에서 그는 후회가 있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아니라고 말했고, 호스트는 그 이유를 물었다.

 

"제가 제 인생을 돌아보는 방식에서 '만약 이랬다면?' 같은 문장은 없어요. 정말 감사한 일이죠. 저는 25살이고 몇 년이 그냥 흘러갔고 이제 경쟁 같은건 없어요. 코치들과의 미팅도 없죠. 전 제 행보를 돌아보면서 '아, 그때 그랬었다면'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런지 밤에 잠도 잘 자고요. 제 안에 있던 경쟁심은 여전히 일이 잘 안 풀린거에 대해 불만에 가득 차 있고 화나 있는 상태죠. 그게 저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죠. 하지만 저를 잡아먹거나 그러지는 않아요."

 

캐슬이 2004년 봄학기에 야구를 하고 있을 때, 그는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모든 것들을 안고 가기로 했다. 3학년 시기의 치열한 경쟁, 매일마다 언론진에 노출되어야 한다는 점은 상당한 스트레스였다. 그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풋볼을 플레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레드셔츠 4학년 시즌에 돌입했다. 왜 굳이 일을 망치겠는가?

 

"저는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죠." 그가 말했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말이 '열심히 안해야지' 이런 말은 아니지만, 약간 '될대로 대라' 같은 식이였던거죠. 제가 만약 경기에 나선다면, 훌륭한거죠. 아니라고 해도, 저는 USC에서 저의 커리어를 마감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데에 감사하고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저는 학위도 있고 모든 것을 다 갖췄어요. 저는 그냥 경기에 나가서 동료들과 다른 모든 것들을 즐기겠다는 생각이었죠."

 

콜리어는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같은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지막 3년 동안, 그가 건강을 유지했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가 경기를 출장할 수 있을 정도의 나이를 채웠을 때, 기회는 그의 바로 앞에서 날라갔다.

 

"현실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좀 걸렸죠," 그가 말했다. "정말 열받는 일이에요. 달리 표현할 단어도 없네요. 6,7,8살 때부터 가지고 있던 꿈이 있었고, 더욱 짜증나는건 그 꿈에 근접했다는 것이었죠. 가까이 갔지만, 이루어내지 못했죠."

 

그는 공부에 몰두했다. 그는 스포츠 매니지먼트에서 박사 학위를 땄고, 애틀랜타 유나이티드에서 세일즈 부문 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의 전체적인 마인드를 뜯어고쳐야 했죠, '나는 누굴까? 나는 여기에 뭘 하러 왔을까? 여기서 내가 어디로 갈 수 있을까?'" 그가 말했다.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하는 영혼을 찾는 질문들이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캐슬의 인생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의 USC 커리어가 끝나자, 그는 자신이 스킬셋은 가지고 있지만 아무에게도 보여줄 기회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테이터"라고 알려진 USC의 쿼터백 코치 칼 스미스를 찾아갔다.

 

"테이터. 어떻게 생각해요? 저는 나가서 프로 데이에 참가해야 될 거 같은데요," 그가 말했다.

 

"캐슬, 난 너의 사고방식을 좋아하지만, 이제는 너가 다른 일을 찾아볼때가 된 것 같은데," 테이터가 말했다.

 

캐슬은 그의 사무실을 나가며 말했다, "X까. 난 나의 길을 간다." 그는 NFL 스카우터 앞에서 열린 프로 데이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였고, 갑자기 모든 스카우터들이 그의 스토리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그들은 캐슬에게 테이프를 보내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가 보내줄 수 있는 것은 봄에 연습한 걸 찍은 몇 개의 필름 뿐이었다. 그는 세네개의 팀들과 비밀 워크아웃을 가졌고, 2005 NFL 드래프트 이전 들리던 소문은 그가 언드래프티 FA로 영입된다는 것이었다.

 

대신에, 뉴 잉글랜드 패트리어츠는 그를 7라운드에서 지명했다. 톰 브래디는 캐슬을 백업으로 맞이했고 어떻게 프로가 되는지에 대해 가르쳐줬다. 그는 3년 동안 브래디의 백업으로 지냈고 브래디가 2008년 무릎 부상으로 시즌 아웃 되자 그의 잠재력을 폭발시킬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는 패트리어츠를 11-5 시즌으로 이끌었고 브래디가 건강해지자 캔자스시티 치프스로 트레이드되었다. 그는 81게임에 선발 출장했고, 치프스를 한 번의 플레이오프로 이끌고 그의 커리어 동안 65 밀리언 이상을 벌었다.

 

"말도 안되는 얘기죠," 그가 말했다.

 

아마 캐슬은 백업 쿼터백이 자신에게 기회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대학 풋볼의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킨 시작점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고교 랭킹 top-50 안에 드는 쿼터백 중 45 퍼센트가 전학을 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현재는 전학하기가 쉬워졌고, 최근 세번의 하이즈먼 수상자 - 메이필드, 머리, 버로우 - 들은 전학생이었다. 만약 캐슬이 지금 뛰었다면 그가 5년 동안이나 백업 역할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콜리어는 오하이오 스테잇 시절 버로우와 경쟁했고 그와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는 버로우가 LSU로 전학갔을 때 그를 응원했고 타이거스의 전국 대회 우승 시즌에는 배턴 루즈를 방문하기도 했다.

 

"많은 쿼터백들은 재능이 넘치는 선수들이고 백업 역할을 하는걸 싫어하죠," 그가 말했다, "내부 문제든, 이미 주전이 있든, 성적 때문이든, 오프필드 이슈든, 어떤 이유든 간에요. 발전할 수가 없거든요."

 

대학 백업 쿼터백은 지구상에서 가장 좋은 직장이 아마 아닐 것이다. 이는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한 사람의 정신을 파괴해 놓을 수도 있다.

 

그래도 특권을 누릴 수는 있다.

 

 

출처: 디 애슬레틱, Brody Miller, <A life of leisure and longing: What it’s like to be a major-college backup QB>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