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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현의 슬라이더는 왜 치기 어려울까?

IN-N-OUT 2021. 7. 19.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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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현의 기세가 무섭다. 최근 24이닝동안 단 1실점만을 내줬고, ERA는 2.87까지 내렸으며 fWAR는 1.4까지 끌어올렸다. 자신의 최고 장점인 장타 억제력을 잘 발휘하고 있는 모습인데, Hard Hit%(34.7%), Barrel%(5.9%)는 모두 리그에서 상위권에 해당한다. 이런 페이스만 유지한다면 다음 FA 시장에서 충분히 좋은 계약을 따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광현의 패스트볼 구위만 보면 이러한 수치가 어떻게 나오는지 의아할 수 있다. 패스트볼의 평균 구속 89.0마일은 리그에서 최하위권에 해당하고 Whiff%는 겨우 10.6%에 불과하다. 패스트볼의 구위 자체만 보면 최근 트리플A에서 선발 로테이션을 돌고 있는 양현종과 큰 차이가 없는 모습이고, 실제 스탯캐스트에서도 김광현으로 유사한 패스트볼을 던지는 선수로 양현종을 꼽을 정도이다.

 

 그러나 김광현은 양현종과는 확실한 차이점이 있다. 바로 슬라이더라는 결정구가 있다는 것이다. 이번 시즌 김광현의 슬라이더 Run Value는 -9인데, 이는 100타석 이상을 상대한 투수 중 전체 7위에 해당하며, 피안타율은 .198에 불과하다. 기대 스탯인 xWOBA(.262), xBA(.197)도 훌륭하다. 하지만 슬라이더 자체도 구위가 뛰어난 구종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평균 구속이 빠르지도 않으며, 수직/수평 무브먼트가 좋은 공도 아니다. 구위 자체로만 따지면 리그에서 하위권으로 분류해도 큰 무리도 아니다. 그럼 왜 이런 슬라이더가 잘 통하는 걸까. 예전에 했던 인터뷰에서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슬라이더도 느리거나 빠른 슬라이더, 스트라이크를 잡는 백도어 슬라이더 등 다양하게 구사하는 편이다. 그것만 해도 이미 세 가지 슬라이더를 던지는 것이고, 쓰리(3) 피치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거기다 직구와 커브를 합하면 파이브(5) 피치다. 한국에서는 내가 던지는 구종의 다양성을 인정받지 못해 조금 속상했고,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랐다. 그런데 메이저리그에서는 내가 똑같은 슬라이더에도 구속 가감하는 걸 정확히 짚어 내더라. 그 부분은 굉장한 희열을 느끼게 해준다.”

출처 - 세인트루이스 김광현 “날 빅리그로 이끈 건 비난과 지적”, 일요신문, 2020.3.20

 

 이 인터뷰의 내용을 토대로 김광현의 슬라이더를 구속을 기준으로 분류해 볼 것이다. 슬라이더의 평균 구속(83.4마일)을 고려하여, 84마일 이상의 슬라이더를 빠른 슬라이더, 82마일 이하를 느린 슬라이더로 부를 것이다. 무브먼트 측면에서 보자면 빠른 슬라이더는 스피드가 빠른 대신, 수직 무브먼트가 적은 반면, 느린 슬라이더는 수직 무브먼트가 두드러진다.

 

 이번 시즌 김광현의 최고의 킬러피치는 바로 빠른 슬라이더이다. 피안타율은 .182에 그치고 있고, K%는 38.6%에 달한다. Exit Velocity도 84.8마일로 약한 타구를 지속적으로 유도하고 있으며, 장타 허용은 단 3개에 지나지 않는다. 빠른 슬라이더의 투구점은 좌타자 기준 바깥쪽 아래 코너이다. 좌타자에게는 멀어지는 방향이고, 우타자에게는 몸쪽으로 휘어져 들어온다. 

 좌타자에게는 특히 악몽같은 피치나 다름없다. 아래 사진이 좌타자 상대로의 빠른 슬라이더 분포도인데, 실투가 별로 없고 커맨드 자체가 좋기 때문에 좌타자들이 공략하기 까다로운 공이다. 좌타자에게 던진 84개의 공 중에서 안타로 연결된 경우는 단 2번에 그쳤고 K%는 43.5%에 달하며, Exit Velocity는 79.9마일에 불과하다. 우타자 상대로는 스탯이 살짝 올라가긴 하지만 피안타율 .233, K% 36.2%, Exit Velocity 87.3마일이라는 준수한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느린 슬라이더는 빠른 슬라이더만큼 좋은 효과를 보이지는 못한다. 피안타율이 .250으로 올라가고, K%는 10.1%로 급격하게 떨어진다. Exit Velocity도 90.8마일로 평균 이상의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느린 슬라이더의 비중을 줄여야 할 필요는 없다. 빠른 슬라이더와 느린 슬라이더의 쓰임새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아래 사진은 빠른 슬라이더의 카운트별 사용 빈도이다. 일반적으로 결정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2스트라이크 이후에 구사되는 비중이 높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느린 슬라이더는 카운트 싸움에 이용된다. 초구로 사용되는 비중도 높고, 카운트에서 불리한 상황에 놓였을 때도 쓰여진다.

 아래 사진은 느린 슬라이더의 투구 분포도인데, 빠른 슬라이더와 달리 존 안으로 향하는 경향이 두드러짐을 확인할 수 있다.

 슬라이더의 위력을 배가시키는 것은 릴리즈포인트이다. 두 슬라이더의 무브먼트는 판이하게 다르지만, 똑같은 타점에서 날아오기 때문에 타자 입장에서는 어떤 공을 상대해야 할 지 판단하기 어렵다.

 포심 패스트볼도 이런 슬라이더의 '우산 효과'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아래 사진은 포심 패스트볼과 슬라이더의 릴리즈 포인트를 보여주는데, 차이가 없이 거의 동일한 위치에서 투구된다. 타자 입장에서는 포심 패스트볼, 빠른 슬라이더, 느린 슬라이더라는 세 가지 선택지를 고려해야만 한다.

 체인지업이나 커브 같은 서드 피치들도 와일드카드로써의 역할은 충분히 해주고 있기 때문에, '기교파' 투수로써의 김광현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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